내가 일어나 (누가복음 15:18)
인생의 절망가운데서 우리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주저앉아 있을 때가 있습니다.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인생의 절망의 자리에 있는 탕자를 보게 됩니다. 이 둘째 아들의 행위는 현재의 중근동 사회에서도 용납 받지 못할 폐륜적인 행동 입니다. 부모가 죽어 유산을 남기기도 전에 자기의 몫을 요구하는 아들의 존재는 그 어디에서도 환영 받지 못할 행동입니다.
둘째 아들의 행동의 결과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잠시 동안 자기의 소유를 가지고 일락의 생활을 할 때는 영원한 기쁨 가운데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환락의 삶의 종국은 유대인들이 그토록 천히 여겼던 돼지우리에서 먹고 자는 삶으로 추락한 것이었습니다. 그 삶의 자리는 내일에 대한 희망과 기대가 전무한 자리였습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품을 떠난다는 것을 쉽게 여기고 그 결과에 대해서 생각 못하지만, 그 결과는 실제적이고 삶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리는 어디입니까? 아버지의 품안입니까? 아니면 아버지 품 밖의 소망 없는 자리입니까? 성경에는 ‘네크로스’(nekros)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단어는 명사로 쓰일 때는 ‘육체가 죽었다’는 의미로 사용되지만 형용사로 사용될 때는 ‘살았으나 죽은 것’을 말하는 관계의 죽음을 말합니다. 우리는 성도의 이름은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의 관계에서 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계는 직분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확증해주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네크로스 관계적 단절에 있다면 우리는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아나스타시스’(anastasis)는 ‘부활’ 즉 ‘다시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삶의 절망의 자리에서 다시 스스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네크로스’에서 ‘아나스타시스’로 다시 일어서고, 아버지의 품으로 가야겠습니다.
본문에서 탕자는 자신의 지난날의 과오로 낙망했지만, ‘다시 일어서겠다’고 다짐합니다. 내가 삶의 끝 나락의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 그분의 품에 들어간다는 것이 바로 탕자의 모습입니다. 무엇이 낙심의 자리에서 문화적, 사회적 인식의 장벽을 넘어서 아버지께로 스스로 돌아가게 했습니까? 그것은 아버지의 사랑이었습니다. 늘 집나간 아들을 기다리던 아버지의 사랑, 아들이 돌아왔을 때 새 옷을 입히고, 반지를 끼워주고, 새신을 신기고, 잔치를 배설했던 아버지의 사랑이었습니다. 베드로 역시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지만 예수님 앞에 다시설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께서 그를 여전히 사랑하시고 기다리셨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사랑으로 기다리는 아버지는 다시 ‘일어나’ 돌아온 아들의 신분도, 관계도 모두 회복시켜 줍니다. 21일 동안의 ‘세이레 특별새벽기도’는 우리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회입니다. 아들이 일어나 돌아가는 결단이 없었다면, 아버지가 사랑으로 준비한 많은 선물은 누구의 것이 되었겠습니까? 우리가 삶의 자리를 딛고 새벽에 일어나 하나님의 잔치에 동참한다면 아버지께서 준비하신 영원한 부활의 은혜가 우리의 것이 될 줄로 믿습니다. 지금 바로 일어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