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아닐지라도” (요한복음 2:13~22)
‘예수님이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을 정화하셨다’는 이야기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본문 가운데 하나입니다. 왜 요한은 예수님 생애의 마지막 사역을 포도주 사건 이후에, 바로 연결해 놓았을까요? 여기에는 요한의 의도가 있다고 보입니다. 평상시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첫째 달 열나흗날 저녁 유월절을 그 정한 기일로 지키기 위해’(레23장; 민9장), 성전 앞에 모였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유월절은 해방 받은 날입니다. 이집트로부터 자유를 얻는 날입니다. 이 유월절의 순간이 로마의 압제 하에 있었던 유대인들에게 얼마나 절실했겠습니까? ‘이집트로부터 해방된 이 유월절의 순간이 우리에게 왔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가지고 성전에 모여 있다고 생각을 해보십시오. 그런데 난데없이, 어떤 청년이 오더니, 노끈을 들고, 성전을 뒤엎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드리려고 했던 소와 양과 비둘기와 재물들을 성전 밖으로 쫓아내었습니다. 예수님은 ‘내 아버지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었다’고 질책하셨습니다.
사실 이 이야기도 의미가 있지만, 문제는 이 사건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입니다. 제자들이 이 사건을 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의 집을 생각하는 열심이 나를삼킬것이다”하고 기록한 성경말씀을 기억하였더라.
시편 69편에 ‘내 일생에 하나님의 전을 열심히 섬기며 살겠습니다’라고 고백하며 살았던 다윗의 성경 말씀을 제자들은 기억하였습니다.
그 때 유대 사람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당신이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습니까?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보낸 사람이라면, 하나님이 보냈다는 그 증거가 표적으로 나타난다’고 믿었습니다. ‘엘리야와 엘리사, 모세 처럼 당신에게서 표적을 볼 수 있겠는가’라고 의문을 제기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유대인들은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고 반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이해 할 수 없는 이 이야기를, 요한이 하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22절)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난 다음에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셨던 말씀을 믿게 되었습니다. ‘가나혼인잔치’에서 시작했던 그들의 믿음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후에 더 견고해졌고, 확실해졌으며, 분명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보지 못하고 믿는 이가 복되다’고 하신 이 말씀이 요한복음의 결론입니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서 그의 말을 믿고 그의 말이 이루어졌음을 믿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들었던 ‘너를 통해 민족을 세우리라’(창12장)는 말씀의 성취가 이루어진 사람이 되시며, 예수님의 증인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매일의 ‘헌신의 시간’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며,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를 믿으므로 그 말씀의 성취가 이루어지는 승리의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