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7: 14~26
바울이 탄 알렉산드리아 호는 꽤 큰 배였지만 유라굴로 태풍 앞에 속수무책으로 나뭇잎처럼 표류하였습니다. 모래톱에 걸리면 끝장이기 때문에 배를 가볍게 하려고 실었던 짐들을 바다에 버렸습니다. 사흘째 되는 날에는 뱃사람들의 손으로 배의 기구들까지 버렸습니다. 그 상황에서는 그 중하게 여겼던 물건들이 아무소용 없었습니다. 태풍에서 살아나려는 안간힘뿐이었습니다. 여러 날 동안 해와 별이 보이지 않고 풍랑 속에 칠흑같이 어두운 날이 계속 되었습니다. 무려 십사일간을 표류하였습니다.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습니다(20절). 뱃사람들도 상인들도 군인들도 죄수들도 모두다 절망적인 탈진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러데 이때 그 사람들 가운데 일어서서 말하는 사람이 한사람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말을 무시하고 그레데 미항을 떠난 것이 큰 타격과 손실을 자초했음을 상기 시켰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여러분 안심하시오” 배는 잃겠지만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을 것입니다. 나의 속한바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젯밤에 내 곁에 서서 말씀하였다고 했습니다.
이 위로와 소망의 말, 백부장도 선장도 돈 많은 선주도 아닌 한사람 죄수의 말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실상 그 배에 탄 276명의 지휘자는 바울이었습니다. 바울의 얼굴을 바라보고 바울의 말을 따랐습니다. 바울의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나의 속한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23절) 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는 물, 불이 해치지 못합니다(사43:1-2).
풍랑은 그 배에 탄 사람들이 똑같이 겪었습니다. 바울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풍랑을 겪는 것은 불신자만 겪는 것 아닙니다. 신자도 겪습니다. 슬프고 아프고 힘든 일 신자도 겪을 수 있습니다. 다른 것은 그 풍랑을 어떻게 대처하고 극복하느냐 그 태도입니다.
6.25 전란 당시 피난민이 몰린 부산을 시찰차 방문한 미국교회 워너 감독이 참담한 판자집에서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찬송소리가 흘러나오는 어느 가정예배의 모습을 보고 감동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아름다운 찬송을 부를 수 있는 국민이라면 소망이 있다고 돌아가 미국교회에 지원을 호소했다고 합니다.
바울은 절망적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일찍이 가이사랴 감옥에서 “네가 로마에서도 나의 일을 증거하여야 하리라” (행23:11) 하신 말씀 그리고 다시금 태풍중에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리라”(24절) 그 말씀을 믿었습니다. 바울은 상황을 보지 않고 말씀을 믿었습니다. 로마에 가서 사명을 감당하기까지 나를 지켜 주신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더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이 바울에게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들을 다 네게 주셨다”(24절)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안심하시오” 위로와 소망을 줄수 있었습니다. 은혜받은 성도는 환난중에도 믿음으로 자신이 설뿐 아니라 환난중의 이웃을 위로하고 격려할 사명이 있습니다. 요셉은 감옥에 갇힌 몸으로 같이 갇힌 감옥안에 사람들을 돌보았습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같은 풍랑의 고통중에도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붙잡아 주기를 힘씁니다. 바울 한사람 때문에 276명이 살게 되었습니다. 소돔, 고모라성이 망한 것은 죄 때문이 아니라 의인 10사람이 없어 망했습니다.
백부장, 선장, 군인들, 상인들, 사람이 할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쓰고 손들었을때 배 한쪽에 침묵하고 있던 바울이 입을 열었습니다. 인간이 포기 했을때 하나님은 시작하십니다.
그배에 정말 보배로운 사람은 바로 하나님의 사람 바울이었습니다. 나 때문에 우리 가정이 구원받고 나 때문에 교회가 복을 받고 우리가 빛되고 소금됨으로 우리 사회, 우리나라가 살고 잘 될 때 우리는 보배로운 사람이 될것입니다.
우리 사회 곳곳이 병들고 부패하였다고 해도 이 만큼 발전하고 유지되어 나가는 것은 곳곳에 들어나지 않은 의인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살고 내 가정이 살고 우리사회 우리나라가 잘되는 길은 우리 각자가 의인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심하시오” 주위의 사람들을 위로하고 소망을 줄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