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질문 다른 대답 (마가복음 10:46~52)
대강절 두 번째 주일입니다. 대강절은 주님을 기다리는 기간입니다. 그분이 누구이기에 우리는 그분을 기다리는 것일까요? 늘 본문에 등장하는 여리고는 예루살렘에서 36km떨어진 곳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려면 이곳에서 하룻길을 머물다 가야하는 곳입니다. 이곳은 해수면보다 250m가 낮은 곳이며 인류 역사상 가장 먼저 도시가 형성된 곳입니다. 여리고라는 뜻은 “달”이라는 의미로 이름이 의미하는 것과 같이 우상숭배가 있었고 발삼이라는 향을 만드는 곳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돈이 많은 곳이었고 로마의 네 개 세관 중 하나가 있는 곳이기도 하였습니다. 풍요롭고 화려한 도시에 오늘 등장하는 거지는 여리고와는 어울리지 않는 초라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또한 모든 사람이 예루살렘을 향해 갈 때 바디매오도 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갈 수 없는 그가 얼마나 가고 싶고 그리웠을까요?
바디매오는 디매오의 아들인데 그 뜻은 흑암입니다. 이런 가문에서 태어나 앞도 못 보는 거지인 이에게 무슨 소망과 기대가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예레미야 스키야 목사라는 분이 만 명이 출석하는 교회 청빙을 받았습니다. 청빙 받은 날 거지로 분장하고 교회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세 명만이 도움을 주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이런 어려운 상황인데 그 당시는 얼마나 더 어려운 상황이었을까요? 170만 명이 모이는 절기, 17만 마리의 양을 잡는 유월절, 그 가운데 과연 몇 명이나 바디매오를 향해 눈길을 주었을까요? 제자들 역시 영광된 자리를 탐할 뿐 거지에게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바디매오가 “다윗의 자손 예수여”라고 외칩니다. 사람들은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에 경계심을 드러내기도 하고 로마가 세관을 두고 있을 만큼 로마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자칫하면 정치적인 모함을 당할 수도 있어 잠잠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외침에 예수님은 돌아서서 바디매오를 향해 시선을 고정합니다. 그리고 그를 불러 말씀합니다. “네게 무엇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그 어디에서도 소망을 얻을 수 없었던 바디매오 어쩌면 그는 이사야35:5절에 메시야가 오면 눈먼 자가 눈 뜰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에 유일한 소망을 두고 그 주님을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바디매오 처럼 기다림입니다. 약속하신 주님, 그 분을 기다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 주님을 기다리는 것이 또한 대강절입니다. 그리고 주님 역시 기다리는 자를 찾고 계십니다.
바디매오에게 평생의 기다림이 주님을 만난 순간 완전한 것으로 변했습니다. 그래서 눈을 뜬 그는 주님을 따라 올라갑니다. 얼마나 원하고 소망하던 순간이었을까요?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는 바디매오의 가슴은 얼마나 벅찬 감동이었을까요? 리가 기다리고 있는 대강절이 바디매오가 주님을 기다린 것 같은 그런 기다림이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그런 기다림 속에서 주님을 만나 벅찬 가슴으로 살아 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이런 기다림과 소망이 우리 모두의 삶에 가득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