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별” (야고보서 2:1~13)
야고보서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종 야고보가 흩어진 열두 지파에게 보낸 편지’(약 1:1)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차별이 심했습니다. 스데반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돌에 맞아서 죽었죠.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형을 시키는 4가지 방법이 있는데, 가장 비참한 방법이 사람을 돌로 치는 것이었습니다. 살기가 등등해진 이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극단적 방법으로 차별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 기독교인들은 그들이 살던 땅에서 먼 타국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안디옥으로, 키프로스 섬으로 흩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종 야고보는 초대교회 안에 존재하는 신분 차별에 대한 경계의 편지를 씁니다. “여러분의 회당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 금가락지를 끼고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도 들어온다고 합시다. 여러분이 화려한 옷차림을 한 사람에게는 특별한 호의를 보이면서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십시오" 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당신은 거기에 서 있든지, 나의 발치에 앉든지 하시오" 하고 말하면, 바로 여러분은 서로서로 차별을 하고, 나쁜 생각으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 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약 2:2-4, 표준새번역). 흩어진 교회에 부자와 가난한 자 간에 차별이 있다면 그것은 온당하지 않습니다. 신분 차별이 초대교회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이와 유사한 일이 불과 몇 십년 전 미국감리교회에도 있었습니다. 부유층은 돈을 주고 좌석을 샀으며 이에 반발한 교인들이 모여서 만든 것이 자유감리교회입니다. 빈부에 상관없이, 성별에 상관없이, 인종에 상관없이,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자리에 앉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 내의 차별은 교회 공동체의 어두운 단면입니다. 파햄(Charles. F. Parham)목사님이 휴스턴에 와서 강의를 하는 데, 시무어(William Seymour) 목사님이 강의를 듣겠다고 찾아왔습니다. 그때는 흑인과 백인이 같이 앉아서 공부할 때가 아닙니다. ‘같이 공부할 수 없으니 가라’고 했는데도, 이 흑인 목사님은 공부하게 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러면 창문을 열테니 밖에서 들으라는 것입니다. 밖에서 강의를 듣다가 이 분이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때의 강의 내용이 ‘성령님이 임하시면 방언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경험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시무어 목사님이 LA에 와서 교회를 개척합니다. 그 교회를 개척한 사람들은 나사렛 교회를 다니다가 나와서 개척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첫날 설교는 이러합니다. ‘우리는 거듭나야 합니다.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나면 방언을 할 수 있습니다.’ 이 설교를 한 번하고 쫓겨납니다. 당시 미국의 성결교회는 방언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 목사님이 한 성도님의 가정에 초청되었는데, 그곳에서 치유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 이야기가 마을 곳곳에 퍼져 마치 마가의 다락방처럼 모든 사람이 이 가정에 모여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 전역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우리 교회 안에는 이러한 차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종교적 열심이 판단 기준이 되고 이에 따라 사람들을 차별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죠. 하나님은 구별하시지만, 차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시선은 믿음이 충만한 이에게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외모로 판단하지 않으시고, 종교적 열심으로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인간은 차별하지만, 하나님은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인간은 실수하지만,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십니다. 성부,성자,성령의 하나님께서는 어떤 차별도 없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뜨겁게 역사하십니다. 주안에서 사랑의 한 주를 보내시고, 주님 안에서 은혜로 인도되는 한 주를 보내시길 빕니다. 주안에서 날마다 승리하는 모든 안중교회 성도들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