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곳에 피어난 사랑” (요한복음 4:27~30)
바리새파는 세례요한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들에게 오지 않고, 요한에게로 가서 회개를 하고, 세례를 받고 따르니, 바리새인들의 입장에서는 신경이 거슬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알고 계신다’ 하였습니다(요 4:1). 필시 바리새인들이 이 일을 문제로 삼을 것을 예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안식일 날 예수께서 병을 고치는 것도 시빗거리로 삼았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갈릴리로 돌아갈 계획을 세우고 계셨죠. 갈릴리로 가는 길은 요단강 동편으로 돌아서 가는 길과 사마리아를 가로 질러 가는 길로 나뉩니다. 유대인들은 북이스라엘의 멸망 후, 앗수르의 혼혈정책으로 인하여 인종과 종교가 뒤섞인 사마리아 땅을 부정한 곳으로 여겼고, 그 곳의 주민들을 멸시하였습니다. 무려 700년 동안 사마리아와 담을 쌓았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 사마리아를 가로 질러 가겠다고 하십니다. 제자들은 ‘요단강으로 갈 수도 있는데 하필이면 사마리아로 가냐’고 했겠죠. 그러나 예수님의 뜻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예수와 그 제자들은 사마리아로 갔습니다. 제자들은 식량으로 구하려 야곱의 우물이 있던 곳으로 갔습니다.
정오 12시, 우물가에 한 여인이 나왔습니다. 뜨거운 땡볕아래 물을 길러 올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도 말이죠. 예수님이 그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하시자 그 여인은 ‘왜 유대인 남자가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고 묻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데, 왜 당신은 나에게 목이 마르니 물을 달라고 하는 것입니까?’ 남자가 여자에게 물을 달라고 하는 것, 게다가 ‘유대인이 사마리아인에게 물을 달라’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막힌 담을 넘으시고, 사회적 통념을 깨시면서 그 여인과 대화를 나누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중략>...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중략>...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 지니라(요 4:10-24).
예수님께서 찾으신 사람들은 자신의 의를 내세우는 유대인들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그토록 멸시하던 사마리아인, 사회에서 소외당하고 천대받는 이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700년 동안 아무도 가지 않았던 사마리아로 가셨습니다. 그 곳에서 한 여인을 만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좌절하고 낙담한 이들을 찾으셨습니다. 문을 굳게 잠그던 사마리아 여인, 문 안에 갇혀 두려움에 떨고 있던 제자들이었습니다. ‘두려워 말라. 평안하여라. 성령을 받으라. 내가 서원하는 것은 나의 부활이 너의 부활을 되기를 바란다. 나는 너를 아직도 사랑한다.’
부활은 나를 찾아주시는 생명의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주님은 실패의 자리, 낙담의 자리에 찾아와 힘 있게 일으켜 세우십니다. 부활의 기쁨 가운데 살도록, 나와 내 가족과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도록 일으키시는 분이 우리 주님이신 것을 믿습니다. 우리를 만나주시는 그 부활의 주님과 힘 있게 동행하는 안중교회 성도들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