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소” (요한복음 3:22~30)
예수님은 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셨을까요? 십자가로 가는 길은 채찍을 맞는 길이고, 수치를 당하는 길이고, 멸시를 당하는 길인데, 왜 그 길로 가셨을까요? 그것이 예수님에게 무슨 의미가 있으며, 무슨 가치가 있을까요? 사람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무엇에 따라 결정을 할까요? 여러분은 결정을 하게 될 때, 무엇이 그 기준이 됩니까?
우리의 삶 속에 끊임없는 갈등이 있습니다. 내 자신의 삶에도 끊임없는 갈등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거듭났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나 사이에,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 것인가’, 아니면 ‘내 생각대로 살 것인가’라는 끊임없는 갈등이 있습니다. 우리의 가정에도 갈등은 있습니다. 가치관의 차이로 인해 부부 사이에 갈등이 생깁니다. 그리고 세대 간의 차이로 갈등을 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에도 끊임없는 갈등이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한 남자와 한 여자를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가정을 만드셨습니다. 결혼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동성애의 물결 속에도 이러한 가치를 지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 갈등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이념적인 차이로 인한 갈등을 우리는 8.15 해방과 6.25 전쟁 후에도 계속 겪고 있지 않습니까? 이러한 차원에서 우리는 세례요한의 행적에 주목해야합니다.
요한이라는 사람의 결정 뒤에는 어떤 가치가 있었을까요? 요한이라는 사람이 열심히 세례를 주고 있는데, 자기에게 나와서 세례를 받았던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유대의 근방에서 세례를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요한을 떠나서 예수님에게 사람들이 몰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불안했을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이런 일은 막아야 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요한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은 공동체가 무너져 갈 위기를 절감하고 요한을 찾아온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말합니다. “나는 사라지고 잊혀져야 한다. 예수님이 반드시 흥해야 한다.” 시소로 비유하자면, 예수님은 올라가야 하고, 세례 요한은 내려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자신의 영역에 들어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빼앗아가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세례 요한은 자신을 가리켜 신랑이 되신 예수께서 박수를 쳐주는 들러리에 불과하다고 말한 것입니다.
시소(seesaw)는 프랑스어 ci-ça[this-that]가 영어화된 단어로써, 이쪽-저쪽 움직이면서, 좌우 균형을 맞추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와 개인 사이에서도 서로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가야 합니다. 그 중심에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신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경 속 위인들에게도 이러한 속성이 발견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시소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가 타는 이 시소가 하나님의 말씀 위에서 균형을 이루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시소는 어느 쪽으로 기울어져 있습니까? 하나님입니까? 우리 자신입니까? 우리의 시소는 하나님을 높이 올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위에 계시고, 우리는 아래에 있어야 합니다. 안중교회 성도들이 타는 시소가 하나님께 속한 시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