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자가 됩시다 (창세기 2:18~25)
명절이 되면 걱정이 앞서는 분들이 많습니다. 돈 걱정, 귀경 길 걱정... 그러나 더 큰 걱정은 사람 만나는 걱정입니다. 오랜만에 시부모님 등 친족들을 만나는데 설레임보다는 두려운 마음이 앞섭니다. 좋지 않은 선 경험들과 연약한 성품들 때문입니다. 사람이 함께 한다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닙니다. 가정에서 부부간에도 부모자식 간에도, 직장에서 동료와 상사 간에도, 교회에서 성도 간에도 동행하는 것이 어려울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일보다 더 어려운 것이 바로 사람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아담 홀로 두지 아니하시고 하와를 만들어 아담에게 이끌어 오셨습니다. 차라리 혼자두면 갈등 할 일도 없고 편했을 텐데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담이 혼자 사는 것을 좋지 않게 여기시고 ‘돕는 배필’로 하와를 아담 곁에 두셨습니다(18~22절).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들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25절). 서로의 인간적인 부족함과 허물이 다 드러났는데도 그 약점을 들추거나 비난하거나 갈등하지 않은 것입니다. 사람이 살면서 부부 간에, 부모자식 간에, 성도 간에 실망과 연약함 때문에 서로 상처를 주고받고 하지 않습니까? 함께 하지 않고 멀리 떨어져 있을 때는 몰랐는데 가까이 동행하고 나니까 모든 것이 발가벗듯 다 드러나 보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아담과 하와는 갈등과 비난 대신 아름다운 동역, 행복한 동행의 삶을 살게 되었을까요?
아담이 하와를 보자마자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는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의 살이라.”(23절) 이 말은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유일한’ 돕는 배필 하와에 대한 최선의 사랑과 용납과 칭찬의 표현입니다. 아담은 다 드러난 하와의 연약함과 허물에도 불구하고 인생의 동반자로서 하와의 존재 그대로를 받아주고 세워주는 하와의 ‘사랑의 동행자’였습니다. 그리고 하와 역시 ‘덮는 배필(?)’로서 아담의 허물을 덮어주고, 자신의 기쁨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담의 행복을 위해서 희생하고 부족함을 채워주는 아담의 ‘사랑의 동행자’였습니다.
사랑은 자신의 위치에서 서로 ‘동행자’가 되어 주는 것입니다. 아담의 위치에 있는 사람(남편, 부모, 상사, 권위자)이라면 ‘예수님처럼’ 상대방의 좋은 것만 보고 칭찬하는 동행자가 되어주고, 하와의 위치에 있는 사람(아내, 자녀, 직원, 동역자)이라면 모든 것을 ‘주님께 하듯이’ 협력하고 섬기는 진정한 동행자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로 우리의 죄와 허물을 덮어주시고, 믿음을 저버리고 도망 간 베드로를 찾아가 행복했던 관계를 다시 회복해 주신 ‘보혜사’(파라 클레토스, 옆에 돕는 자, 돕는 배필)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아름다운 동역자, 행복한 동행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